[이 기사에 나온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업정보는 유니콘팩토리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글로벌 벤처캐피털(VC) 시장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글로벌 VC 투자액은 2050억 달러에 달했다. 전년 동기 대비 32% 증가했는데 이중 700억 달러 이상이 11개 기업에 집중됐다. 미국에서는 AI(인공지능) 스타트업이 1분기 VC 투자금의 57.9%, 2분기에는 45%를 흡수하며 사실상 단일 산업 주도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경기 순환 차원의 변화라기보다는 자본과 기회, 정보가 소수 기업과 VC에 집중되는 구조적 양극화로 볼 수 있다. 스케일AI가 143억달러, 오픈AI가 400억달러를 유치한 사례는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은 변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한국 VC 산업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변화는 투자 방식에도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대형 글로벌 VC들은 초기 투자를 넘어 후기 성장 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사업 전략과 지배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준 사모펀드형(Semi-PE)'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단순한 자금 공급이 아니라 기업가치 극대화를 위한 설계와 관리 능력이 투자 성과를 좌우하는 구조로 가고 있다.
단독 운용자(Solo GP) 모델도 확산되고 있다. 산업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갖춘 벤처캐피탈리스트나 창업자 출신 전문가가 중소형 펀드를 조성하고 투자 기회를 포착해 대형 VC가 간과하기 쉬운 틈새시장을 유연하게 공략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여성, 이민자, 창업자 출신 전문가들의 참여도 활발하고 좋은 성과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데이터 투자는 끝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순한 데이터와 산업 분석 기반 판단으로는 시장을 선도하기 어렵다는 자성이다. 결국 VC의 본질인 산업에 대한 통찰, 창업자와의 신뢰, 현장 경험이 투자 판단의 핵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동시에 AI 기반 분석 툴의 고도화는 정량과 직관을 결합한 새로운 투자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VC 생태계도 이 구조적 전환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간의 성장과 유니콘 배출은 의미 있는 성과였지만 글로벌 시장의 변화는 새로운 대응과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첫재, 투자 전후 단계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초기 투자, 후속 투자, 스케일업, 회수 구조까지 기업 성장 전 주기를 전략적으로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해외 VC와 달리 투자 기간이 일률적으로 특정기한(4년)에 의무적으로 묶여있는 국내 VC펀드 운영 규정에 대한 제고도 필요한 시점이다.
둘째, 특정 산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장기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전문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AI, 바이오, 반도체, 로보틱스 등 기술 중심 분야에서는 기술의 복잡성과 산업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투자 자체가 어려워진다.
셋째, AI 기반 투자 프로세스의 본격적인 도입이 불가피하다. 글로벌 VC는 이미 다양한 데이터 툴을 활용해 투자 효율성과 분석 정밀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 VC도 기술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추고 인사이트 기반 판단과 결합할 수 있는 내재화를 서둘러야 한다.
물론 국내 생태계는 회수시장, 제도 환경, 산업 저변 등 여러 면에서 미국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자본의 흐름과 기술 혁신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글로벌 변화는 곧 현실이 된다.
벤처투자는 단순한 자금 운용을 넘어 산업의 미래와 창업가의 비전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지금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빠른 적응과 분명한 전략이다. 위기처럼 보일 수 있는 변화는, 제대로 준비한 이들에게는 기회가 된다. 한국 VC 산업은 유연성과 실행력을 갖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 큰 흐름의 방향을 읽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한 때다. 지금이 바로 그 전환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