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 나온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업정보는 유니콘팩토리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 2026'은 화려한 신기술로 가득했다. KITIA(한국소재부품장비투자기관협의회) 회장으로 참관단과 함께 주요 부스를 방문하며 기술의 비전과 화려함을 넘어 구체화하고 있는 '산업에 대한 적용성과 상용화'가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AI(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미래의 기술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던 무대가 이젠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효율을 높이는지, 즉 '산업화 역량'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쓰는 현장이 됐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기술이 산업의 중심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AI를 도입하지 않은 기업을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역설적으로 AI 자체는 더 이상 차별점이 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만난 다수의 빅테크와 스타트업도 'AI 기업'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AI를 사업 현장에 어떻게 적용하고, 제조 공정의 불량을 낮추고, 유지보수 비용을 줄이는지, 특정 산업 영역에서 어떤 차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등 구체적인 지표를 제시했다. AI는 더 이상 신기술을 자랑하는 트렌드가 아닌 기본이 됐다. 성패는 실행력과 산업 적용 역량에 달려 있음을 빅테크와 스타트업 모두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주목할 흐름은 '피지컬 AI(Physical AI)'의 부상이다.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무인화 솔루션이 단순한 시연을 넘어 실제 '사업'의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은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명확한 신호를 보낸다. 투자의 중심축이 LLM(거대언어모델) 성능 경쟁에서 벗어나 현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중국 기업들의 약진은 위협적이다. 이들은 단순히 저가 제품을 내놓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막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부품 내재화와 공급망 통합, 강력한 양산 체계를 바탕으로 제품 완성도와 제어 안정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드론과 전기차 시장에서 나타났던 중국 중심의 독주 체제가 로봇 산업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일본 기업들이 신뢰를 기반으로 '구매 가능한 기술'을 제시하며 경쟁력을 회복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미래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중·일 3국 중 어느 곳이 승리할까. 한국 VC는 어느 부문 투자에 집중해야 할까.
그 해답은 '기술 비전'을 넘어선 '산업 적용의 구체성'에 있다. 한국 스타트업들은 참신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개념 검증(PoC) 단계에서 정체되는 경우가 많다. 비전 중심의 화려한 외형보다 구체적인 산업 현장의 난제를 해결하며 글로벌 톱티어로 도약할 수 있는 실전형 스타트업에 집중해야 한다.
몇몇 국내 피지컬 AI 및 로봇 스타트업이 좋은 사례다. 이들은 생산 및 조선과 같은 거대한 산업 제조 현장에서 피지컬 AI와 로봇 기술을 정밀하게 이식하고 있다. 척박한 산업 현장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AI와 로봇이 사람의 노동을 보조하며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산업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독보적인 도메인 지식과 현장에서 검증된 핵심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이 우리의 주요 투자대상이 돼야 한다.
로봇 산업을 예로 들면 병목 부분인 액추에이터·감속기·센서 퓨전 등 핵심 부품과 제어 기술 같은 부분이 전략적 투자처가 될 것이다. 현장에서 운영을 최적화하는 산업 특화 소프트웨어(SaaS)와 AI 구동에 따르는 비용과 전력을 줄이는 효율화 기술도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다.
최근 산업계 화두가 된 현대차의 아틀라스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로봇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안전과 품질, 양산 체계와 유통망이 갖춰진 사업 시스템으로 진화할 때 시장이 열린다. 이 점에서 스타트업들 역시 기술 시연을 넘어 양산, 가격까지 아우르는 실전 전략을 갖춰야 중국의 거대한 진격 앞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CES 참관을 통해 얻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현란한 기술 비전의 시대에서 적용성과 상용화의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장에선 여전히 기술 비전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더 늦기 전에 투자 판단의 무게 중심을 미래 비전에서 현장 실현 가능성으로 옮겨야 하는 이유다. 글로벌 시장은 '발 빠른 코끼리'처럼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움직인다.
한국은 뛰어난 제조 경쟁력과 강력한 소부장 산업, 글로벌 OEM 기업을 보유한 만큼 AI, 로봇과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스타트업을 집중 발굴하고 적극 투자해야 한다. 세계 기술 시장과 투자 업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