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혁신의 요람인가, 희망고문의 실험실인가.
규제샌드박스는 대한민국 혁신성장의 상징적인 제도다. '일단 허용해 혁신에 한 걸음 다가간다'는 전제 아래 낡은 법령에 가로막힌 신산업이 세상에 나오도록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위해 생겨났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루센트블록 사태'는 이 제도의 치명적인 결함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혁신을 위해 조성된 실험공간이 실험이 끝난 뒤엔 오히려 기업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분쟁의 출발점'이 됐다는 비판이다.
문제의 핵심은 실험이 종료된 후 '출발선'에 관한 문제다. 루센트블록과 같은 핀테크·부동산 조각투자 기업들은 규제샌드박스라는 틀 안에서 비즈니스 모델의 유효성을 검증했다. 하지만 그 검증결과가 제도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해당 기업들은 정책설계의 주체가 아닌 '참고용 데이터 제공자'로 전락했다. 이는 혁신의 통로가 정교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정책적 공정성의 훼손이다.
2. 한국형 샌드박스의 맹점 : 실험 이후 법적 진공상태.
현재 한국의 규제샌드박스는 실험의 단계까지는 매뉴얼을 갖고 있다. 일정기간 규제를 유예하고 특정한 조건을 부가해 실증을 허용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정부가 모니터링한다. 문제는 실증기간이 종료된 후 그 결과물이 제도화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 실험을 성공시킨 주역인 샌드박스 참여기업이 새로운 제도하에서 어떤 우선권이나 권리를 갖는지엔 침묵한다.
참여기업은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실험단계에선 리스크를 무릅쓰고 신대륙을 개척하는 '퍼스트무버'로 칭송받지만 제도화 국면에선 기득권의 저항과 행정적 편의주의에 밀려 '닭 쫓던 강아지' 신세가 되기 일쑤다. 이는 기업 입장에서 볼 때 정부의 정책실험에 이용당하고 결국 시장지위를 박탈당하는 '정책적 이용'에 불과하다는 박탈감을 준다.
3. 선진 사례의 시사점 : '실험'이 아닌 '단계적 진입'으로의 설계.
선진국들은 규제샌드박스를 단순한 '예외 허용'이 아니라 정식 제도권 진입을 위한 '연속적인 프로세스'로 인식한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의 샌드박스는 제도 밖의 임시공간이 아니다. 기업이 샌드박스에 참여하는 시점부터 어떤 지표를 달성하고 어떤 요건을 충족하면 정식 인가(Authorisation)로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로드맵이 공유된다. 샌드박스 참여과정 자체가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한 공적 절차의 일부인 셈이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의 샌드박스는 단계별 인가체계로 운영한다. 실증 이후엔 '샌드박스 익스프레스를 통한 간소화된 인가나 조건부 인가 등을 거쳐 정식 라이선스로 이어지는 경로가 명확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규제샌드박스를 정부와 기업의 일종의 '정책적 계약'으로 본다는 점이다. 기업이 리스크를 지고 정책실험의 데이터를 제공했다면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안착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다.
4. 공정성 회복을 위한 제도적 대안.
규제샌드박스가 혁신의 마중물로서 제기능을 다하기 위해선 실증종료 후의 불확실성을 해소할 구체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첫째, 샌드박스 승인 당시 부여받은 조건과 성과를 달성한 경우 정식 제도권에 진입할 때 가점을 부여하거나 우선적인 인가기회를 주는 등 정책실험에 대한 정당한 보상체계가 확립돼야 한다. 둘째, 제도화의 판단기준과 절차를 사전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실증이 끝난 뒤에야 제도화 여부와 방식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단계부터 '어떤 성과가 도출되면 어떤 방식으로 법령을 개정할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해야 한다. 셋째, 제도화 지연이나 정책방향 선회시 참여기업을 보호하는 '경과규정 및 보호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5. 창업국가로 가는 길, 대못을 뽑아야 한다.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의 핵심 화두는 '창업'이다. 하지만 정부의 말만 믿고 험지에 뛰어든 창업가들이 제도화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토사구팽되는 사례가 반복된다면 어느 누가 혁신에 도전하겠는가. 루센트블록 사태는 단순히 한 기업의 분쟁을 넘어 대한민국 규제혁신 시스템의 신뢰도를 시험하는 척도다. 젊은 창업가들이 흘린 땀이 제도화라는 이름 아래 기득권의 논리에 잠식되지 않도록 관계당국은 규제샌드박스의 '빈칸'을 공정성과 신뢰라는 가치로 채워넣어야 한다.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창업가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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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사진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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