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V로 여는 K스타트업 수출 2.0-①]
보호무역주의 기조 강화...JV 통한 해외진출 주목
[편집자주] 중소·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이 기술만으로 해외시장을 뚫던 방식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특히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보호무역주의가 거세지면서 기업이 독자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이런 가운데 해외 기업과의 조인트벤처(JV) 설립을 통한 현지화 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방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글로벌디지털혁신네트워크(GDIN) 등 정부와 공공기관도 해외진출 지원 사업으로 기업들의 JV 설립을 적극 돕고 있다. 정부의 해외진출 지원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JV 전략을 짚어본다.
[이 기사에 나온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업정보는 유니콘팩토리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산 스타트업 마리나체인은 해운·물류산업의 탄소배출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EU(유럽연합)·IMO(국제해사기구) 기준에 맞춰 탄소 회계를 수행하는 플랫폼을 개발했다. 이 회사는 덴마크 클린테크 기업 그린마린과 손잡고 연내 싱가포르에 JV를 설립할 계획이다. 바이오연료 중개·탄소규제 컨설팅·데이터 플랫폼을 통합한 탈탄소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다. 마리나체인은 AI 기술과 플랫폼 개발을, 그린마린은 유통 인프라·현지 영업·해운사 네트워크 확보를 맡아 '해운 탈탄소 허브' 모델을 실증할 계획이다.
#더코더는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게 정보를 저장해 위변조를 방지하는 DOT(Data on Things) 코드 기술을 활용해 정품 인증과 위조 방지, 공급망 추적 등을 수행하는 보안솔루션을 개발했다. 이 회사는 연내 대만 제조기업 민즈(MINZ)와 JV를 설립, 글로벌 진출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더코더는 기술 개발을, 민즈는 고객사 발굴과 투자유치를 담당한다. 두 기업은 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장 가능한 '보안 제조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미 식음료 패키지 실증 테스트까지 마쳤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 방식은 비교적 단순했다. 현지에 법인이나 지사를 세우고, 유통 대리점을 통한 수출 구조를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기술과 제품만 잘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첨단기술을 둘러싼 규제는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지정학적 리스크는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고 있다. 해외시장의 소비자 문화와 제도 역시 예상보다 훨씬 폐쇄적으로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롭게 꺼내든 해법이 있다. 현지 기업과 손잡고 아예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조인트벤처(JV) 전략'이다. JV는 두 기업 이상이 자본·기술·인력·시장 접근성을 공유하며 공동 목표를 위해 회사를 새로 세우는 방식이다. 기술은 있지만 판로가 없거나 유통망은 있지만 혁신 역량이 부족한 기업들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다. 특히 해외 시장에서는 문화·규제·제도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JV만큼 현실적인 방법도 드물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혁신기술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는 글로벌디지털혁신네트워크(GDIN)의 김종갑 대표는 "투자 부담을 줄이면서도 시장과의 접점을 확보하고, 까다로운 규제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JV는 현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해외진출 방식"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동과 일부 신흥국에서는 현지 기업과 합작사를 설립하지 않으면 사업 허가도, 공공 프로젝트 입찰 자격도 주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일본처럼 외국 기업에 보수적인 시장에서도 JV를 통해 기업 이름과 간판부터 현지화함으로써 소비자의 심리적 거부감을 낮추는 전략이 일반화되고 있다. 조인트벤처(JV)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김종갑 GDIN 대표/자료사진=머니투데이
이러한 흐름은 우리 정부의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GDIN이 추진하고 있는 'D.N.A. 융합 제품·서비스 해외진출 지원사업'은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JV 설립을 위한 법률, 특허(IP), 회계·세무, 현지 마케팅, 현지활동비 등을 패키지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실제 성과도 나오고 있다. 경북 구미의 의료기기 기업 라이노케어코리아는 코막힘 완화기기 '라이노케어'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며 이스라엘 의료기기 전문기업 리노케어(RhinoCare)와 JV 설립을 결정했다. 양사는 연내 싱가포르에 합작법인을 세워 라이노케어코리아는 기술·제조·브랜드 관리를, 리노케어는 유통·임상·마케팅을 맡는 방식으로 역할을 분담할 계획이다.
AI 기반 진로·학업 설계 플랫폼 '더 폰드'를 개발한 에듀테크 기업 레티튜는 지난 9월 말레이시아 교육기업 쉬프트(Shft)와 현지에 JV를 설립했다. 동남아 시장 공략을 위해서다. 양측은 디지털 학습 체험공간 '에드테크 스튜디오'를 조성해 AI 학습 분석과 진로 설계 기능을 현지 교육 시스템에 적용하는 모델을 준비 중이다. 레티튜 관계자는 "한국의 에듀테크 서비스가 아시아 공교육 체계 안으로 본격 진입하는 첫 실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헬스온클라우드는 멕시코의 에토스 클리니컬(Ethos Clinical)과 JV 설립을 통해 중남미 의료 인력 부족 및 인프라 격차 문제 해결을 위한 'K-형 의료 디지털화 패키지' 실증 사업을 준비 중이다. 헬스온클라우드는 기술·설계·교육을, 에토스 클리니컬은 인허가·의료기관 연결·공공 프로젝트 연계를 맡는 방식으로, 중남미 보건 정책 실행 파트너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종갑 대표는 "JV를 활용하면 소규모 투자만으로도 글로벌 계열사를 각 지역에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별 멀티플 엑시트(투자금 회수)나 역 M&A도 가능하다"며 "JV는 해외진출을 위한 옵션이 아니라 글로벌 전략의 새로운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