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엔젤투자리스트 최고위 과정 모집

미국에 퍼진 중국 '996' 문화…"70시간 근무" 조건 걸고 사람 뽑는다[트민자]

윤세미 기자 기사 입력 2025.10.12 12:25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 해주세요.

공유하기
글자크기
[편집자주] 트민자는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의 줄임말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눈에 띄는 흐름을 포착해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 기술 산업의 메카 실리콘밸리에 '996' 바람이 불고 있다. '워라밸'을 포기한 고강도 근로문화가 확산하면서다. 인공지능(AI) 기술 선점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출세와 부에 대한 스타트업계의 열망이 변화를 이끌고 있단 분석이 나온다.

996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일하는 근로문화를 일컫는다. 2010년대 중국에서 알리바바, 화웨이, 바이트댄스 같은 기업들이 급속한 성장을 위해 고강도 근무를 요구하면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996을 두고 '현대판 노예'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반발이 커지자 2021년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72시간 근무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실리콘밸리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중국이 996을 채택할 때 실리콘밸리는 무제한 유급휴가, 금요일 단축근무, 재택근무 같은 복리후생을 제공하면서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는 게 미국 매체들의 지적이다. 과거와 달리 996 문화가 실리콘밸리 주류로 파고들면서 근무 루틴이자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핀테크 스타트업 램프는 올해 상반기 샌프란시스코에서 토요일 법인카드 결제가 전년 대비 현저히 증가했다고 밝혔다. 최근 스타트업들은 채용 공고에 주 70시간 근무를 예상한다고 공지하고 면접에서도 지원자들에게 그런 근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예컨대 AI 음성 분석 서비스회사 릴라는 최근 20만~30만달러(약 2억8000만~4억2000만원) 연봉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채용 공고를 내면서 주당 70시간 근무 가능자를 조건으로 달았다.

워싱턴대학교의 역사학자 마거릿 오마라는 "실리콘밸리에서 996이란 용어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도 이미 워커홀릭 같은 강도 높은 근로문화가 있었다"면서 "다만 996은 그보다 좀 더 극단적인 버전"이라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실리콘밸리의 변화는 최근 수년 동안 기술업계에서 진행된 감원 흐름과 맞물린다. 엔터프러너에 따르면 2022년 이후 미국 IT업계에서 약 40만개 일자리가 사라진 것으로 집계된다. 올해만 해도 인텔,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거대 공룡들은 수만 명 규모로 감원을 단행했다. 기술업계 종사자들이 느끼는 고용 불안정이 996식 근무문화로 나타난 셈이다.

수년 동안 기술업계를 휩쓰는 AI 열풍의 효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지에서는 이번 AI 붐을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술적 대전환으로 보고 시장 점유율을 더 확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특히 중국과 AI 패권을 두고 주도권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성과에 대한 압박도 커졌다.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는 최근 팟캐스트 '올인'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할 라이벌은 중국"이라면서 "중국의 워라밸은 996이다. 물론 중국은 이것을 불법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다들 그렇게 일한다"고 말했다.

AI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불안감이 깔려있다는 시각도 있다. 인간 지능에 필적하는 수준의 범용 AI가 등장하면 한순간에 '영구적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 있단 위기감 때문에 그 전에 빨리 부를 모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확산돼 있다는 설명이다. 첨단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기술 종사자들이 느끼는 AI의 위협은 더 클 수 있다.

AI 안정성 스타트업인 CTGT의 창업자인 시릴 고를라 CEO는 "매일 14시간 이상 근무한다. 총알도 뚫지 못할 AI를 만들고 싶은 광적인 열망 때문"이라며 "맨해튼 프로젝트나 미 항공우주국(NASA)의 대형 임무 당시 보여준 혹독한 근무환경을 보면 이런 근로문화가 미국에서 아예 없던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 기자 사진 윤세미 기자

이 기사 어땠나요?

이 시각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