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혁신의 꿈

임상연 미래산업부장 기사 입력 2023.01.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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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뉴스1) 공정식 기자 = 1일 오전 대구 동구 금호강 아양기찻길에서 시민들이 힘차게 떠오르는 2023년 새해 일출을 맞이하고 있다. 2023.1.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구=뉴스1) 공정식 기자 = 1일 오전 대구 동구 금호강 아양기찻길에서 시민들이 힘차게 떠오르는 2023년 새해 일출을 맞이하고 있다. 2023.1.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난 12월 어느 늦은 오후, 서울 명동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다. 거리는 일찍부터 장사 나온 노점상과 인파로 북적였다. 거리제한이 풀리자 세밑 풍경도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상점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휩쓸려 총총히 약속장소로 이동할 때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인순이(김인순)의 '거위의 꿈'이다.

'난, 난 꿈이 있었죠 /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이날 설립 4년차 스타트업 임원으로 재취업했다가 자연인으로 돌아온 오랜 지인을 만났다. 그는 1년여 만에 스타트업을 떠난 이유를 담담히 전했다.

"30년 금융경력이 신생기업과 젊은 CEO(최고경영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투자유치가 틀어지고 자금이 말라버리니 꿈도, 도전도 모든 게 순식간에 멈춰버렸다. 대기업에서 경험한 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하차해 부담을 덜어주는 게 그나마 도와주는 거였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70세 인턴 벤 휘태커(영화 '인턴', 로버트 드니로 분)가 30대 여성 CEO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 분)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깊은 우정을 쌓는다는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작동하려면 영화 속 설정처럼 모든 조건이 들어맞아야 한다.

가진 거라곤 가능성뿐인 스타트업이 자금난에 허리띠를 바짝 조여야 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란 많지 않다. 죽거나(폐업), 혹은 버티거나(구조조정). 벤의 대사처럼 경험은 나이가 들지 않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 헛된 꿈은 독이라고 /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벤처투자 열기가 급격히 식어버리면서 극초기기업은 물론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들마저 비상이다. 제때 자금을 구하지 못해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폐업하는 곳이 늘고 있다.

돈줄이 마르자 가능성과 잠재력에 베팅하던 벤처캐피탈(VC)조차 최근엔 수익성과 리스크헤지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투자조건으로 무리한 담보(옵션)를 요구하는 불공정 관행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혁신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한국형 모험자본의 민낯이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민간주도 혁신성장만 외친다. 그러면서 창업생태계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올해 모태펀드 예산은 40% 줄였다. 선진국처럼 국내 창업생태계도 어느 정도 성숙했다는 판단인데 과연 그럴까.

현장에선 "대기업조차 몸을 사리는 긴축의 시대에 너무 앞서가고 있다 " "회수시장 등 혁신금융 인프라는 변한 게 없는데 서두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제 뜀뛰기를 시작한 아이에게 마라톤을 권유하는 격이다"와 같은 반응이 쏟아진다. 제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득이 아닌 독이 된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 그 꿈을 믿어요 / 나를 지켜봐요….'

올해 한국 경제는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 이어지면서 더욱 험난한 한해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조차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6%에 그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놨다. 증권가에선 더 비관적인 예측도 나온다.

경기침체 파고가 커지면 미래를, 꿈을 먹고사는 창업생태계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창업도전 정신이 사그라지면 혁신성장의 꿈도 그만큼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어렵게 지핀 제2벤처붐이 거품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도록 창업생태계 곳곳을 꼼꼼히 살피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혁신의 발목을 잡는 각종 산업·투자규제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혁신금융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기술패권주의가 심화하면서 미국, 중국, 독일, 일본 등 주요국들은 신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육성에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지금은 누가 주도하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민관이 함께 총력전을 펼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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