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약은 투자일까, 대출일까. 고금리 사채라고 해도 될 법한 이 계약은 스타트업이 투자를 유치할 때 벤처캐피탈(VC) 등 투자자들로부터 요구받는 조건을 요약한 것이다. 투자자마다 세부 조건은 다르지만 이런 식의 독소조항이 포함된 계약이 '표준'처럼 쓰인다는 것이 업계의 전언이다. 연대책임만 하더라도 창업자 3명 중 1명이 요구받았다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 설문조사도 있다. 업계에서 "스타트업 투자는 합법적인 사채놀이"라는 자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모태펀드 등 정부 정책자금을 출자받은 VC들마저 이 같은 불공정 계약을 하는 것으로 지난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모태펀드 출자를 받은 VC가 투자계약시 독소조항을 넣는 등 준수사항을 위반해 지적받은 사례가 2021년 39건에서 2023년 107건으로 2년 새 3배 급증했다. 성과미달시 투자금 조기회수, IPO 실패시 손해배상이나 증권가격 조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HB인베스트먼트가 2016년 수제맥주 스타트업 코리아크래프트비어(KCB)에 투자하며 체결한 계약이 대표적이다. 당시 HB인베스트먼트는 모태펀드 출자를 받아 조성한 벤처펀드로 50억원을 투자하며 '2022년까지 IPO' 조건을 걸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원금과 연 20% 복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상장에 실패하자 실제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지난 5월 1심에서 "상장을 회피하거나 업무를 소홀히 한 증거가 없다"며 KCB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IPO 의무위반을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부여해 고액의 이자를 내도록 하는 것은 불공정 계약이며 벤처투자의 본질 및 스타트업을 육성하려는 정책적 측면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굳이 그런 불공정 계약을 하느냐"는 질문은 현실을 모르는 일이다. 가진 것이라곤 기술과 아이디어뿐인 스타트업이 '을'의 위치에서 시장의 관행을 거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불공정 계약이 지속되는 데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 1997년 벤처기업육성법이 제정된 후 역대 정부마다 모험자본을 늘려 벤처투자 시장을 육성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사채놀이하는 모험자본만 키운 꼴이 됐다.
연대책임 문제만 봐도 그렇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2년 벤처투자촉진법 시행령을 개정해 벤처펀드가 투자계약시 고의나 중과실이 없으면 창업자에게 연대책임을 부과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가 신기술금융사의 투자계약을 규제하는 여신전문금융업법을 개정하지 않으면서 연대책임 문제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신기술금융사가 벤처투자 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데도 부처간 엇박자로 반쪽짜리 제도가 된 것이다.
한성숙 중기부 장관은 지난 5일 벤처투자업계와 간담회에서 "공정한 투자계약 문화조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기울어진 계약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 연대책임 규제를 신기술금융사 등 모든 투자자로 확대적용하는 것은 물론 투자계약시 불합리한 조건을 요구하는 투자자의 경우 정책자금 출자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참에 중기부와 금융위로 이원화한 벤처투자 시장의 감독권을 일원화하는 방안도 논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창업하면 패가망신'과 같은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한 것도 벤처투자 시장의 불공정 계약관행과 무관치 않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회에서 혁신이 일어날 리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청년 창업자들과 만나 약속한 '스타트업이 미래 경제를 주도하는 제3벤처붐 시대'를 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같은 불공정한 계약관행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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