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998년 벤처기업육성특별법 도입 후 국내 창업생태계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질적인 면에선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수도권 쏠림은 심화하고, 글로벌화는 더디기만 하다. 전문가들은 창업이 경제를 이끄는 동력으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창업생태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국가 차원을 넘어 지역 단위 맞춤형 창업생태계를 구축, '글로벌 창업도시'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유니콘팩토리가 다각도로 짚어본다.
[이 기사에 나온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업정보는 유니콘팩토리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약 2000억원의 국비 투입으로 7배에 가까운 매출을 창출했다."
강원 춘천의 바이오 산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춘천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지역 바이오 기업의 총 매출액은 1조3915억원, 고용인원은 3168명으로 2003년 대비 각각 37.1배, 10.5배 늘었다. 춘천은 1998년 국내 최초 '바이오 산업 시범도시'로 지정된 이후 산업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왔다. 현재는 '바이오 딥테크(첨단기술) 창업'의 거점으로 부상하며 강원도 창업생태계의 핵심 축을 맡고 있다.
2023년 기준 춘천에는 총 236개 벤처기업이 활동 중이며, 이중 창업 7년 미만의 초기기업이 55.1%를 차지한다. 강원대·한림대 등 의과대학 2곳과 강원테크노파크, 춘천바이오산업진흥원 등이 모여 있는 데다 인근 홍천(국가항체클러스터)·원주(의료기기 산업)·강릉(바이오 소재) 등과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 탄탄한 바이오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수도권보다 투자금이나 전문 연구인력 확보에 불리하고, 강원도 내 창업지원기관 간 기능 중복과 경쟁으로 인한 비효율 등은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유니콘팩토리'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가춘천 창업생태계를 심층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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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인프라 연계로 바이오 기업 성장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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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창업생태계의 가장 큰 강점은 바이오·헬스케어 산업을 뒷받침하는 기관·기업의 높은 밀집도와 탄탄한 정책 지원 체계다. 대표 거점인 춘천바이오산업진흥원은 체외진단, 동물대체시험 기반 신약 개발, 디지털 CDMO(위탁개발·생산) 등 고도화된 연구 인프라를 갖췄으며 최근엔 AI(인공지능) 기반 천연물 신약 개발 플랫폼 조성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인근 원주의 원주의료기기산업진흥원에는 국내 대형 의료기기 기업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 강원 지역 의료기기 수출액은 지난해 7억4720만달러를 기록했으며 최근 5년간 연평균 9.7%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강릉의 강릉과학산업진흥원은 해양바이오, 천연물, 기능성 식품 등 바이오소재 연구와 공급을 맡고 있으며, 홍천의 국가항체클러스터는 면역치료제,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 등 고부가가치 항체 의약품 생산의 핵심 거점이다. 이들 기관은 바이오 벤처·스타트업이 고가 장비나 대규모 설비 없이도 R&D(연구개발)와 생산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춘천은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실증특례를 받을 수 있는 환경도 갖췄다. 여기에 강원대 의대, 한림대 의대 등 지역 의과대학이 바이오 기업의 임상 등 기술 실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집적 효과 덕분에 현재 춘천에는 100여 개 바이오 기업이 자리 잡고 있으며, 휴젤·에이프릴바이오·씨트리 등 7곳의 코스닥 상장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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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딥테크 창업' 활발 …교원창업 2배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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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은 특히 타 지역 대비 '대학 중심 딥테크 창업 역량'이 강점으로 꼽힌다. STEPI 조사에 따르면 춘천의 교원창업의 경우 2022년 12개에서 2024년 24개로 2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교원창업 기업의 매출액도 1840억원에서 2802억원으로 성장했다. 이는 창업중심대학, 라이즈(RISE), 글로컬대학30 등 국가 전략사업을 통해 대학 보유 특허가 창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실제로 강원대는 이러한 제도를 발판으로 지금까지 총 140개의 교원창업기업을 배출했고, 이중 80여곳이 현재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내년 상반기 준공 예정인 '캠퍼스혁신파크'와 '기업혁신파크'도 딥테크 창업에 힘을 보탤 전망이다. 강원지방중소벤처기업청 관계자는 "기존 춘천 바이오 기업 중엔 사업 확장 수요가 많은데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며 "기업혁신파크가 들어서면 이런 문제가 해소돼 더 큰 규모의 기업 유치도 가능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 부문에서는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가 투자 기능을 대폭 강화하면서 창업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센터는 선임급 인력 4명을 투자 부서에 배치하고, 9개 정부 신규사업에 신청하는 등 정책 지원 사업 확대에 적극 나서고 있다.
강원지방중소벤처기업청은 예비·초기창업패키지, 스타트업 멘토링 및 네트워킹 등 다양한 지원 사업으로 강원 지역 창업기업의 성장을 종합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매년 11월 열리는 '강원창업주간'은 지역 창업지원기관, 창업자, 투자자가 한자리에 모여 협업을 촉진하고 지원 사업을 집중 홍보하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교통 접근성도 경쟁력이다. 춘천은 ITX로 서울까지 1시간 10분, 고속도로 이용 시 1시간 내외에 닿을 수 있어 청년·전문인력 유치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평가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외관/사진=강원혁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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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지원 효율화·정주 여건 개선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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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소재 기업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면인터뷰에서 지적된 문제 중 하나로 '창업지원기관 간 기능 중복과 비효율성'이 꼽힌다. 참여한 기업체 한 관계자는 "현재 기업들은 디자인, 투자, 마케팅 등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여러 기관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구조"라며 "각 기관이 기능별로 역할을 분담하고, 원스톱 협력 지원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춘천시는 최근 '창업혁신협의회'를 출범시켰다. 중소벤처기업청, 창업진흥원, 강원혁신센터, 지역 대학, 민간 기업 등이 참여하는 민·관 협력체로, 정기적인 소통을 통해 창업기업 수요를 발굴하고 맞춤형 지원으로 연결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는다.
바이오 산업이 춘천의 주요 성장축이지만 R&D 연계나 고급 연구인력 확보를 위한 국책연구기관이 전무하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기업이 성장한 뒤 7년 이상 되면 투자를 유치하거나 경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서울로 이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교통·주거·교육 등 생활 인프라 부족으로 청년 인재의 정주 여건도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박순홍 강원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은 이에 대해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 수 있도록 정착 인센티브, 전문인력 양성, 창업 교육, 귀향 유도 프로그램 등 다각도로 정책을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춘천은 점처럼 흩어진 기관들을 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라며 "이 구조를 '초광역 창업 전략'으로 확장한다면 강원 전역을 바이오·푸드·디지털 기반 창업지대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