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학 권위자의 '실험실창업'…전자투표부터 물류까지 철통보안

최우영 기자 기사 입력 2026.04.1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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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UP스토리]영지식 보안 스타트업 지크립토 창업자 오현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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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옥 지크립토 대표. /사진=최우영 기자
오현옥 지크립토 대표. /사진=최우영 기자
오현옥 한양대 교수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암호학 권위자다. 오 교수의 전문 분야인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 ZKP)'을 다룬 논문은 보안 분야의 글로벌 최상위급 저널에서 '최우수 논문'에 꼽혔다. 한국은행의 디지털화폐(CBDC) 모의실험에도 기술을 공급한다. 암호학 분야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 홍조 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그런데 오 교수의 연구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영지식 증명 기술을 발현하는 데 컴퓨팅 자원이 너무 많이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연산 속도가 너무 느려져 실무적으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오 교수는 충분히 실용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사회적인 파급력을 보여주기 위해 '투표 시스템'을 만들어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막상 기술을 개발하고 나니 타인에게 전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2020년 겨울 직접 창업하며 '오 교수'에서 '오 대표'가 되기로 했다. 블록체인 보안 스타트업 '지크립토'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전자투표의 안전성 확보…법 개정되면 다음 대선부터 활용


CES 2024에서 선보인 지케이보팅. /사진=지크립토
CES 2024에서 선보인 지케이보팅. /사진=지크립토
지크립토의 상징 기술인 '영지식 증명'은 쉽게 말해 '나의 비밀 정보를 상대방에게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해당 정보 보유 여부와 진위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기술'이다. 지크립토가 개발한 투표 시스템 지케이보팅(zkVoting)에 이 기술이 적용되면서 참여자의 투표권과 투표행위 여부는 증명하되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가릴 수 있게 됐다.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채택한 전자투표 솔루션이 지케이보팅이다. 공공기관과 학교 등에선 이 시스템으로 전자투표가 가능하다. 최근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 중 한 곳에서도 내부 경선에 지케이보팅을 쓰고 있다. 다만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 등에 쓰려면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오현옥 대표는 "선거법이 개정되면 다음 대선부터는 재외국민이나 선상투표 등에서 전자투표가 활용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투표장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이들에게 전자투표가 권리를 보장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해외 거주 국민 중 선거권자로 추정되는 이들은 200만명이 넘지만 선거인 명부엔 20만명 가량만 등록된다. 해외에선 본인이 매 선거마다 직접 투표하겠다고 신고한 뒤 투표장까지 먼 거리를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원격 투표는 불가능하다.

선원들의 '선상 투표'는 원격으로 가능하지만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 선장이 선원들의 투표용지를 모두 모아 팩스로 전송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 대표는 "선원들이 지케이보팅을 이용하게 되면 보통선거에 더해 비밀선거의 원칙까지 지킬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빗썸 오지급 사태, 실시간 감시 솔루션 있었더라면


지케이보팅의 기술 설명. /사진=지크립토
지케이보팅의 기술 설명. /사진=지크립토
오현옥 대표는 "영지식증명 기반 기술을 확보하니 여러 분야로 확장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며 "대신 시장성이 크면서도 신뢰와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영역에 우선 진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투표 이후 진출한 분야가 '금융'이었다. 현재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하면서도 사후 감사가 가능한 디지털자산 지갑 '지케이월렛', 금융기관의 자산 내역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준비금 보유현황을 실시간 검증할 수 있는 거래 플랫폼 '파인애플'을 서비스하고 있다.

오 대표는 지난 2월 빗썸에서 발생한 수십조원대의 비트코인 오지급 사태를 언급하며 "실시간으로 증거금을 감시하는 기능이 없었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고"라고 바라봤다. 당시 빗썸이 실수로 지급한 비트코인 양은 실제 보유한 수량의 약 12배에 달했다.

지크립토는 지난 2월부터 삼성SDS와 손잡고 디지털자산 보안솔루션 기술을 삼성SDS의 클라우드 환경에 연동해 적합성을 검증하기로 했다. 향후 사업화 가능성까지 공동 검토한다. 영지식증명 기술을 클라우드 인프라에 적용해 상용성을 점검함으로써 '제2의 빗썸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디지털자산 신뢰 인프라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이다.


물류부터 규제 대응까지 무한한 확장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지크립토는 향후 영지식증명 기술을 물류에 접목한 '지케이로지스', 대량의 개인정보에 적용하는 '지케이코호트'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지케이로지스는 유통제품 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물류 흐름을 고객에게 보여주는 솔루션이다. 지케이코호트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등 의료 관련기관이 보유한 데이터를 연구자들이 연구에 활용하면서도 개인정보를 침해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오 대표는 "유럽에서 내년부터 섬유와 배터리 제품에 적용되는 디지털제품여권(DPP) 규제에 대응하는 데도 영지식 증명이 유용하다"며 "기업의 영업비밀은 보장하면서도 현지 규제를 준수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DPP는 해당 제품이 아동 착취 없이 만들어졌는지, 환경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등을 증명토록 한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기업의 기밀 등이 인증기관에 넘어갈 우려가 있다. 영지식 증명 기술을 활용하면 제품 정보 유출 없이도 인증을 받을 길이 열린다.


학자들로 쌓은 높은 기술장벽…관건은 '제도와의 융합'


오현옥 대표와 함께 지크립토를 이끌고 있는 암호·블록체인 분야 전문가들. /사진=지크립토
오현옥 대표와 함께 지크립토를 이끌고 있는 암호·블록체인 분야 전문가들. /사진=지크립토
영지식 증명 기술은 단순한 암호화를 넘어 다양한 수학 이론이 집약됐다. 이를 실제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크립토는 이 복잡한 연산 과정을 모바일 기기에서도 돌아갈 정도로 가볍고 빠르게 최적화했다. 일반적인 개발자들이 쉽게 따라잡기 힘든 영역이다.

세계적 암호학자인 오현옥 대표, 지크립토를 공동 창업한 뒤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은 김지혜 국민대 전자공학부 교수 등 인적자원 자체가 지크립토의 기술장벽이다. 오 대표 수준의 암호학자도 흔치 않지만, 직접 창업 전선에 뛰어든 사례는 더욱 드물다. 후발 주자가 단순히 오픈소스를 가져다 쓰는 수준으로는 따라잡기 힘들다. 이 같은 독창성 덕분에 지크립토는 2023~2024 CES 사이버보안·사생활보호 부문에서 연이어 최고혁신상을 받았다.

오 대표는 "기술의 상업화 이전에 개념 실증(PoC)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려움들을 학교에서 먼저 풀어본다"며 "실험실 창업기업의 장점"이라고 전했다. 이어 "영지식 증명의 상업화는 기술만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와의 융합도 상당히 중요하다"며 "금융제도처럼 보수적인 영역에서는 새로운 기업이 들어가기 쉽지 않은데 일정 부분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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