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 기업들의 대미투자는 한미 경제협력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논의된 3500억달러(약 5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계획은 미국의 무역적자 해소 및 자국 제조업 일자리 창출이라는 통상압박에 대한 전략적 대응의 성격이 강하다. 현재 이 막대한 자본투입은 주로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같은 첨단 제조업 분야 대기업 중심의 현지 생산시설 및 공급망 안정화에 집중된다. 대미투자의 일부를 스타트업의 글로벌 스케일업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현재 대규모 대미투자가 집중된 대기업 주도의 투자는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대응하기 어려운 기술적 경직성이라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반면 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우리나라 경제에서 신규 일자리 창출과 산업구조 혁신의 주역은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대기업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파괴적 혁신을 이루고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을 모색한다.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이 미국의 자본 및 기술생태계와 연계될 수 있다면 AI(인공지능)와 바이오산업과 같은 딥테크(deep tech) 영역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AI 스타트업은 우수한 수학, 컴퓨팅 인력 및 데이터 처리능력을 바탕으로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했다. 이들이 미국 시장의 초대형 IT기업 수요와 VC(벤처캐피탈) 자본과 연결된다면 글로벌 스케일업 및 투자유치를 달성할 수 있다. 바이오분야 역시 임상데이터 및 R&D 역량이 강점으로 혁신적 신약 및 디지털 치료제 기술을 보유했다. 이 분야의 대미투자는 현지 임상전문가 및 자금확보를 통해 우리 기술의 상업화 속도를 결정적으로 높일 수 있다.
대규모 대미투자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기회를 살리기 위해 우리 정부는 '투트랙(two-track) 연계 전략'을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 정부 및 민간이 미국에 스타트업 글로벌 혁신거점을 확보토록 협업공간 및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적 투자를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재능 있는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현지 투자자, 대기업이 상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비즈니스 협력 및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우연한 만남'(serendipity)의 장소가 된다. 더 나아가 세계적 명성을 가진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유치하거나 공동운영하는 것을 필수화해 한국 스타트업이 현지에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글로벌 시장의 검증을 받고 미국 내 투자유치 시스템에 편입되도록 돕는다.
둘째, 거대 글로벌 자본의 투입이 국내 벤처생태계 기반을 약화하는 '역차별'이 되지 않고 글로벌 스케일업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내 VC의 역할과 상생구축이 필수다. 글로벌 펀드는 한국의 유망 스타트업을 이미 초기단계에서 발굴하고 검증한 국내 VC와 공동투자를 하게 해야 한다. 이는 대규모 글로벌 자본이 이미 검증된 국내 투자거래 흐름에 흘러들어가도록 유도함으로써 투자실패 확률을 낮추고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또한 국내 VC가 글로벌 펀드운용에 참여하고 미국의 선진 VC와 협력하는 과정은 국내 VC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투자회수(exit) 및 기업가치 평가기법을 학습하고 국내 벤처생태계 전반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1990년대 말 재미사업가 이종문 회장이 스탠퍼드대학교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벤처창업가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당시 정보통신부가 적극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지원해 우리나라 벤처, 스타트업 커뮤니티가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의 3500억달러 대미투자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재정의돼야 한다. 현재 대기업 중심의 투자가 '방어적 투자'의 성격이 강하다면 스타트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공격적 투자'인 것이다. 지금은 스타트업을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엔진으로 인식하고 대미투자의 흐름 속에 공격적 전략을 고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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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사진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벤처창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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